한평농장/♤고향소식(기자단포스팅)

김제벽골제비및제방(金堤碧骨堤碑및堤防)

한평농장 2007. 8. 8. 10:18
반응형


종    목 사적  제111호
명     칭 김제벽골제비및제방(金堤碧骨堤碑및堤防)
분     류 유적건조물 / 산업생산/ 농업/ 관개시설
수량/면적 187,473㎡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119
시     대 삼국시대
소 유 자 국유,사유
관 리 자 김제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김제시 부량면 포교리와 월승리에 걸쳐 있는 저수지의 중수비(重修碑) 및 제방을 말한다.

이 저수지는 벽골제(碧骨堤)라고 하는데, 이 벽골제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축조하였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의 영토가 아니라 백제의 영토였으므로 후대에

신라기년(新羅紀年)으로 고쳐져서 신라가 축조한 것처럼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 벽골제(碧骨堤)가 축조된 것은 백제의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뒤 벽골제는 원성왕 6년(790)에 증축한 바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고려 현종 및 인종 때와 조선 태종(太宗) 15년(1415)에

 개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익이 적고 폐단이 많아 한때 폐지되기도 하였다.

유적은 현재 포교리에서 시작하여 월승리에 이르는 평지에 일직선으로 약 3km 정도의 제방이 남아

있으며, 제방에 부수된 시설로는 제방의 남단 수문지였던 경장거(經藏渠), 북단 수문지였던

장생거(長生渠), 그리고 중앙 수문지였던 거대한 석주(石柱) 등이 우뚝 서 있다. 그러나 1925년에

일제(日帝)에 의해 동진농지개량조합(東津農地改良組合)에서 이 제방을 관개용(灌漑用)

수로(水路)로 개조하여 이용함으로써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한편, 1975년에 있었던 수문지(水門址) 2개소에 대한 발굴조사에 의하면 제방의 높이는 약 4.3m,

윗변의 너비는 7.5m, 밑변의 너비는 17.5m의 규모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문(水門)의

너비는 4.2m이며, 여기에 사용된 돌기둥의 높이는 5.5m이고, 돌기둥 1개의 무게는 약 8톤에

달하였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기둥의 안쪽에는 너비 20cm, 깊이 12cm의 홈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 목제둑판을 넣어 상하로 이동시키면서 방수량을 조절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수문(水門)의

외부로는 호안석(護岸石)이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수로(水路)가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제방은 세 번에 걸쳐 판축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 판축토 아래에 두께 2cm정도의 흑색

식물탄화층이 있어 이 탄화물로 세 차례에 걸쳐 방사성탄소 측정을 해 본 결과 4세기라는

절대연대가 나와 문헌 기록과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벽골제(碧骨堤)는 부분적인

개수공사는 있었지만 전장 3km에 달하는 제방과 수문의 돌기둥 및 그 바깥쪽에 있는

호안석(護岸石) 등은 시축(始築) 때부터 현재와 같은 규모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볼 때 이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 데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로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 획기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제방의 북쪽

기점인 포량리 근처의 초혜산(草鞋山) 정상 남단에는 조선시대에 건립한 벽골제 중수비(重修碑)가

남아 있다. 비신(碑身)은 점판암제로 되어 있는데,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석비(石碑)의 크기는 높이 6.4척(尺), 너비 3.4(尺)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