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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상의 위치 ![]() 식물계는 크게 포자(胞子)에 의해 번식하는 포자식물(胞子植物)과 생식기관인 꽃을 갖고 열매를 맺으며 씨로 번식하는 종자식물(種子植物)로 나뉜다. 녹색식물은 고사리류를 제외하고는 모두 종자식물에 속하는데 종자식물을 다시 소나무 잦나무등 침렵수류를 주종으로 하는 밑씨가 자방(子房)안에 들어 있지 않은 나자식물(裸子植物)과 밑씨가 자방 속에 싸여있는 피자식물(被子植物)로 구분된다. 녹색식물의 대부분은 바로 이 피자식물에 속한다. 피자식물은 바로 외떡잎인 단자엽식물(單子葉植物)로 난은 식물학상 종자식물의 피자식물중 단자엽식물인 난과식물에 속한다. 좁고 긴잎을 가지며 잎맥은 잎을 따라 평행으로 생긴다. 뿌리와 잎 외에 줄기에 해당하는 가구경(假球莖 또는 위구경; Pseudo-bulb)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구경은 영양저장고의 역할을 맡고 있다. 암,수술이 각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 꽃의 형태이나 난은 하나의 굵은 암술에 수술인 꽃가루덩어리(花粉塊)가 같이 있고 암술의 밑에서 꿀이 분비되므로 곤충이나 벌레에 의해 수정(受精)된다 이렇게 수정이 되면 한송이의 꽃에서 십만이 넘는 씨를 갖게된다 이러한 것들이 식물학상 진화가 가장빠른 종류로 난과식물을 꼽게되는 이유가 된다 동양란중에서도 춘란은 우리나라의 남부지방과 도서지방에서 자생하는 한국춘란 일본열도에서 나오는 일본춘란 중국대륙에서 자생하는 중국춘란 및 대만춘란 모두를 합친 단자식물 가운데 난과식물로 심비디움속(Cymbidium屬)에 속하는 하나의 종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한국춘란과 일본춘란 중국춘란 대만춘란을 모두 춘란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춘화(報春花)로 불리워지는 한국춘란의 학명은 Cymbidium Goeringii(Cymbidium Virescens Lindley)로 일본춘란과는 식물학상으로 같은 위치에 속한다. 원예학적 분류 ![]() 지구상의 식물중에서 가장 진화했다는 난과식물(蘭科植物)은 세계곳곳에 자생하며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난은 모든 화훼 식물중에서 가장 다양하면서도 매혹적인 식물이다. 전세계적으로 사막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으며 심지어 극지방에까지 서식하고 있는 것도 알려져 있으며 총 730종류(genera: 분류학상 屬과 種의 중간)에 3만여종(species)에 이르는 다양한 난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수천종은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난과식물은 식물학적 분류가 아닌 원예학적 편의에 의해 크게 동양란, 서양란 그리고 야생란으로 크게 세가지로 분류된다. 서양란이란 서양에서 자라는 난이란 뜻이 아니라 동남아일대와 남미 브라질의 밀림지대나 맥시코 아프리카 등의 아열대지방에서 자생하며 영국을 중심으로 개발 보급된 난을 가리키며 우리나라 가정에서 흔히 기르고있는 심비디움, 덴파레, 덴드로비움, 팔레높시스(호접난- 胡蝶蘭)등이 있다 이에 반하여 동양란은 온대 아시아인 우리나라와 중국 대만 일본에서 나는 심비디움속(Cymbidium屬)의 춘란, 한란, 혜란, 금릉변과 덴드로비움속(Dendrobium屬)의 석곡(石斛) 네오피네티아속(Neofinetia屬)의 풍란(風蘭), 에어리데스속(Aerides屬)의 나도풍란을 합하여 동양란이라 한다. 야생란이란 산과들에서 자생하는 난과식물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동양란도 처음에는 모두 야생의 상태였으나 오랜 재배역사로 관상의 기준이 서고 분류와 재배법이 안정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룬 것이다 그런 몇가지의 종류를 제외한 광범위한 난과식물을 총칭하여 야생란이라고 하며 야생란은 뿌리를 땅에 뻗치고 자라는 지생란(地生蘭)과 바위나 나무위에 뿌리를 벋고 자라는 착생란(着生蘭) 그리고 썩은 식물의 부식물이 있는 곳에서 자라는 부생란(腐生蘭)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 자생하고 있는 야생란은 새우란초 복주머니난초 병아리난초 자란 금은난초 닭의난초 해오라비난초 나리난초 옥잠난초 나비난초 방울새난초 타래난초 개제비난초 등 그종류가 약70여종류에 이른다. 서양란은 원종에서 파생된 수많은 교배종들이 매년 새로이 생겨나고 있으며 화려한 색상과 풍만한 화형을 자랑한다 그러나 동양란은 모두가 야생에서 채취된 원종들로 이루어져 의연한 깊이의 선(線)과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고고하고도 섬세한 곡선을 그리는 잎의 아름다움과 그윽한 꽃향기는 자연을 벗삼아 정신적인 세계에서 노닐기를 원하는 동양인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하다 같은 난과식물중에서 외형과 내면으로 비교되는 이들의 특성은 각기 동양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옛부터 난(蘭)하면 꽃대하나에 꽃이 한송이 피는 것을 말하고 꽃대 하나에 꽃이 여러송이 달리는 것을 혜(蕙)라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난이라면 곧 춘란(春蘭)을 연상하게 된다. 중국춘란은 한국춘란과 일본춘란에서 볼 수 없는 청초하고 그윽한 향기가 특징이다. 향이 없는 일본춘란은 색(色)과 무늬로 방향을 돌려 원예개발을 시도하여 다양한 엽예품(葉藝品)과 화예품(花藝品)을 갖고 있다 한국춘란은 일본춘란과 함께 향기는 없지만 단아한 자태에 풍겨지는 청초한 인상은 가히 아름다움의 극치라 할수 있다 비록 원예화된 배양 역사는 짧지만 발견되는 품종은 자질이 매우 뛰어나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할수 있다. 동양란의 역사 ![]() 난(蘭)이란 단어는 기원전 6세기경에 중국의 공자(孔子 ; BC 552 - 479년)에 의해서 엮어진 시경(詩經)에서부터 나타난다 시경은 기원전 12세기 ∼ 기원전 6세기 까지 불려지던 시 모음집으로 두편의 시에 처음 등장한다 아직까지 군자의 이미지는 보이지 않고 구애(求愛)의 물표이거나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비유되는 표현 수단으로 쓰였다. 공자가어(孔子家語 ; 공자의 언행 및 문인과의 문답 논의를 적은책)에는 난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세 번나오는데 이 때에야 비로소 난은 군자의 격에 비유된다. 이러한 난의 이미지는 중국 전국시대의 굴원(屈原 ; BC 343 ∼ 277년)을 거치며 여러 문인과 묵객(墨客)들에게서 자연스레 군자와 함께 오르내리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난과 그 시대에 얘기되어진 난과는 과연 식물학상 같은 종일까? 라는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남송시대(南宋時代 ; 1127 ∼ 1278년)의 주희(朱熹 ; 1130 ∼ 1200년)가 저술한 초사변증(楚辭辯證 ; 1199년간행)에는 식물의 종으로 확실히 다르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난이 난으로 불려진 것은 북송시대(北宋時代 ; 960 ∼ 1126년)의 중기 이후로 남송시대에 그 원예적인 재배가 크게 성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 불려지던 난이란 현재 향등골나물 골등골나물 등골나물로 불리는 등골나물속으로 추정 되어지며 송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늘날의 난에게 그명칭을 물려준다. 근 2,000년 간이나 군자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난이란 단어가 자연스레 옮겨진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빼어난 향기로 군자에 비유되며 난으로 불려지던 중 당말(唐末)에 이르러 오늘날의 난이 발견된다. 처음에는 같은 격으로 대접받으며 두 종류 모두 난으로 불려지다 점차 오늘날의 난이 진란(眞蘭)으로 굳어지게 된다. 굳이 같은 종이니 아니니 따질만한 성격의 것은 아니기에 공자시대부터의 난이란 모두 하나로 대접받았다. 이미지에 합당한 상태를 난이라 일컬었고 이미 가리키던 것에서 더욱 어울리는 쪽으로 옮겨진 것 뿐이기 때문이다. 난이란 뜻에 있어서의 변화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난이 완상(玩賞)의 대상으로 가꾸어진 것은 11세기 중엽인 북송시대의 중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며 남송시대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우게 된다. 13세기에는 금장난보(金障蘭譜 ; 趙時庚) 왕씨난보(王氏蘭譜 ; 王貴學)가 저술되는등 난에 관한 여러책들이 저술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문인들 사이에 묵란화가 유행하게 되어 명대(明代)에 이르러서는 수묵사군자(水墨四君子)로 굳게 되었으며 확실하게 난의 자리를 차지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난의 역사와 전망 ![]() 우리나라의 문헌에서는 통일신라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 857 - ?)의 문장에서 난(蘭)이란 글을 찾을수 있다 "夫人德芳蘭蕙 禮潔 繁 遽失所天加沒干地........."(부인의 덕은 난혜처럼 향기롭고 예는 빈번(개구리밥과 산흰쑥)처럼 조촐한데 갑자기 남편을 잃음에 땅에 묻히어 죽은듯하다 ........... ) 이는 왕비의 덕을 난혜(蘭蕙)에 비유한글로서 발견된 것으로는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고운(孤雲)의 다른 싯귀에도 난이란 글자를 찾을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이규보, 이곡, 정몽주등 많은 문인들의 글에서 나타나고 있다. 傲雪蘭(오설란) 彈入宣尼操(탄입선니조) 爲大夫佩(인위대부패) 十董當一蘭(십동당일란) 所以復見受(소이복견수) 공자가 거문고에 난조(蘭操)를 싣고 대부의 패에는 난을 새기네 난 한송이가 열을 당하니 이에 다시 보고 사랑하노라 오설란을 노래하며 충절을 나타낸 이는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인 성삼문(成三問)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난은 높은 격으로 노래되었고 매창(梅窓)이나 난설헌(蘭雪軒) 등의 여류시인들은 물론 휴정이나 유정 등의 고승들의 작품에서도 난은 쉽게 찾아 볼수 있다. 묵란화(墨蘭畵)는 고려말 옥서침과 윤삼산이 그렸다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현존하는 최고품은 조선 선조시대의 이증(李 )이 그린 춘란도(春蘭圖)이다 특히 조선말의 김정희와 대원군 이하응, 민영익등이 유명하다 난에 관한 설명이 들어있는 문헌으로는 세종31년인 1449년에 간행된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들 수 있다. 本國蘭蕙品類不多 移盆後葉漸短香亦劣殊 失國香之義 故看花者不甚相尙 然生湖南沿海諸山者品佳 霜後勿傷垂帶 舊土依古方截盆爲妙 우리나라에는 난혜의 종류가 많지 않은데 분에 옮긴 후 잎이 점차 짧아지며 향기 또한 겨우 나는 정도여서 국향의 뜻을 잃는다. 그러므로 꽃을 본 자는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호남연해의 여러 산에서 나는 것은 그 품종이 아름답다. 서리가 내린 후에 뿌리가 상하지 않게 자생지의 흙으로 싸주고 옛 방식에 의하여 분에 심으면 좋다. 이것으로 15세기에는 이미 중국란이 알려졌음은 물론 한국춘란도 발견되어 기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藍)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산림경제(山林經濟)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등 적지않은 문헌들에서 난에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특히 신경준(申景濬 ; 1715 - 1781년)의 여암유고(旅菴遺稿)에는 "我國濟州獨有蕙......."란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에서의 혜(蕙)란 당시에는 일경다화(一莖多花)를 가리키는 용어로 한란(寒蘭)을 지칭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그후 한란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 1786 ∼1856년)에 의하여 비로소 육지에까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품종이다. 이렇듯이 난에 관한 시문(詩文) ,묵란도(墨蘭圖)와 문헌들이 많으나 널리 가꾸어 졌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일부 지식층에 한정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나마 많은 수는 관념에 의한 난 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한국춘란은 향을 중요시하는 중국풍에 젖었던 지식층에 있어 양화소록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 관심이 미미했다. 한국춘란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이다 소수 특권계층에 의하여 움직여지던 난취미계가 수입이 자유로와 짐으로 인하여 넓게 확산되기 시작됐다. 난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많은 사람의 안목이 높아지면서 애란인들은 우리의 것을 찾기 시작했다. 한국춘란은 본래 녹색의 잎과 녹색의 꽃이나 우리의 것에 대한 애착으로 서서히 적화,황화, 주금화 등의 색화(色花)와 복륜, 중투호 등 잎이 변이되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고 거의 모든 화예품(花藝品)과 엽예품(葉藝品)이 망라되어 발견되었다. 이제는 난문화(蘭文化) , 난계(蘭界)라는 말이 자주 나올 정도로 발돋움 하였으며 동호인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불붙은 한국춘란의 붐은 우리의 난(蘭)이라는 자긍심을 높여주었고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않는 단아한 자태의 모습은 애란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화색이나 무늬가 점차 고정되면서 이제 한국춘란은 우리 난계에 구심점이 되었다. 짧은 기간동안 한국춘란이 이렇게 발전하고 사랑을 받게된 원인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첫째, 한국춘란의 자질로 어디에나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우수한 품종 들이 많다. 둘째, 한국인의 미(美)의식의 발전으로 완상(玩賞)할 수 있는 능력의 애란인이 많아 졌다. 셋째, 애란인의 증가로 인한 채란인의 증가와 우리의 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넷째, 취미 애란가들의 동호인회 결성이 왕성히 일어나 난개발에 박차가 가해졌다. 다섯째, 전시회가 활발히 일어나 정보교환 및 난고정 배양에 힘을 쏟았다. 여섯째, 난 전문상이 생겨 우수품종의 난을 보급 배양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일곱째, 난 전문잡지 등을 통하여 활발한 정보교환이 난계 발전을 가속화 시켰다. 예로부터 민족과 함께 우리나라에 자생해온 한국춘란은 화려하지도 않고 드러내지 않는 수줍은 자태 그 단아한 모습이 비로소 우리 곁에 다가왔다. 난을 가까이 하기 전에는 그다지 변하지 않는 그저 푸르기만한 초본식물이라 느낀다. 그러나 가까이 하게되면 난의 변화에 매료되고 만다. 미의 감각이 발달되면 될수록 점점 그 미학으로 세계인의 공통어가 되는것이 난이다. 한국란 개발 10년 정도에 훌륭한 자질의 난이 많이 나왔다는 것은 우리 난계로서는 매우 뿌듯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많은 동호인들이 늘어났고 배양에 온정성을 기울이는 배양가도 많아졌다. 아직까지 고정되지 않은 품종들이 고정화를 기다리고 있는 싯점에서 우리 난계의 과제는 이러한 한국춘란을 원예화시켜 고정화하는데 있다 할 것이다. 그가능성은 무한하기에 이제껏 발전해온 한국난계의 기쁨 못지않게 발전해 나갈 기다림의 기쁨도 큰 것이다. 月刊 蘭과生活社刊 "東洋蘭" 중에서 양란 배양의 역사 ![]() 양란에 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 전 300년경 데오프라스투스(Theophrastus)가 지중해지역의 어떤 난꽃의 모습이 남자의 생식기인 한 쌍의 고환 (그리이스어 orkhis)을 닮았다고 기록한 자료이다. 이 Orchis란 단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럽종 난에 적용되어 쓰여지고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 蘭科植物群을 일컫는 orchids의 유래가 되었다. 양란의 재배는 유럽대륙에서 시작되었다. 16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유럽에서 서식하고 있는 蘭科植物 만을 재배하고 있었는데 외래종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이것은 탐험과 무역 그리고 선교의 부산물이었다. 비록 그들에게 전달된 난들은 빈사 상태의 보잘 것 없는 몰골의 것들이었지만 식물학자와 원예가들은 즉각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 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식민지의 개척과 더불어 1700년도 후반에서 1800년도 초에 많은 탐험대가 열대지방의 탐험에 나섰다. 남미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이 주 활동무대였다. 이들이 보내 온 새로운 식물들은 유럽의 식물학자와 원예가 그리고 다른 탐험대들을 자극시켰고 유럽인들은 그들의 나라에 자생하고 있는 난들이 열대지방에서 보내어지는 다양하고 엄청난 양의 난에 비해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와 종류의 난을 찾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많은 자금이 탐험대에 주어졌고 산채인들은 육체적인 역경을 감수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목숨을 걸기까지 하였다. 이들의 경쟁은 날로 치열해져서 접근하기 어려운 깊은 계곡이나 절벽, 정글 그리고 고산지역과 늪지대까지 뒤지기 시작하였고 서로가 채취한 난에 자극을 받고 질투심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발견한 장소를 비밀에 붙이거나 거짓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1700년도 중반에 설립된 왕립식물원이 있었는데 초기에 발견되어 영국으로 보내어진 난들은 이 식물원에서 재배되거나 귀족을 중심으로 유리 온실을 갖고 있는 부유한 층에서만 재배를 할 수 있었다. 1818년 영국의 William Cattley가 'stove(난로)'라고 부르고 있는 자신의 유리 온실에서 대단히 아름다운 꽃이 개화한 것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서 당시의 유명한 식물학자인 John Lindley에게 보여주었다. 이 꽃은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 근처의 Organ산에서 채취된 식물들의 포장재로 쓰여져 그에게 배달된 것으로 온실의 한귀퉁이에 팽개쳐져 있었던 것이었다. John Lindley는 그 난의 이름을 Cattley의 이름을 따서 Cattleya(캬틀레야)라고 명명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양란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캬틀레야의 유래이다. 곧 이 꽃은 대량재배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에 자극받아 더 많은 수집가들이 산지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난들을 소위 '난로'라고 부르는 뜨거운 유리온실에서 배양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이 낯선 식물이 흙이 담긴 일반 분에서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이 난들이 열대지방에서 보내온 것이었기에 뜨겁고 비가 많은 습한 환경이 필요할 것이라고 가정했는데 실제 대부분은 해발 수백미터의 어두운 숲의 그늘에서 채취된 것이었기 때문에 환경이 맞질 않았다. 또 어떤 것들은 폭포나 냇가 옆에서 항상 스프레이와 안개에 쌓인 환경에서 채취된 것도 있었고 나뭇가지에 착생된 상태, 흙이나 초원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 등등 개체별로 그 환경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로 수천 수만개의 귀한 난들이 죽어갔고 당시 왕립식물원장인 Joseph Dalton Hooker는 "영국은 열대 난들의 무덤이 되어가고 있다."고 까지 한탄했다. 한편 John Lindley는 산채인들로부터 채취한 난의 서식지의 환경을 계속 조사했다. 그리고 그의 충고로 배양가들은 온실 문을 열어 보다 시원한 공기와 많은 통풍이 되도록 하였고 어두운 숲속의 그늘의 조건에 가깝게 새로운 환경을 조성했다. 이 때부터 난의 대량재배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유리 온실을 갖고 있는 부유한 층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배양의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숙련된 배양가를 고용해서 난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특정개체의 배양법을 터득한 사람들은 이 배양법을 비밀에 붙이고 공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19세기 말에 이르게 되어서는 난의 대량재배는 위험성이 적은 사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재배가 용이하여지자 야생에서 채취한 새로운 난을 구입하는 것은 빅토리아시 대의 부유층의 취미가 되어갔다. 상업적인 난 재배는 1900년~1920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이를 배양하려는 아마추어 애란인이 급증하였으며 이러한 소장가의 증가로 새로운 야생란의 수요가 또 증가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포기를 나누어 분주를 받지 못하면 수입되는 난을 구입하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이 때는 열대지방에서 활약하던 전문적인 산채인들이 하나 둘씩 줄어들기 시작한 때였다. 서식지의 환경도 많이 황폐해져 난을 찾기가 어려워졌으며 열병이나 말라리아에 의한 질병으로 죽거나 원주민에게 살해당하거나 이미 늙어버렸거나 한 시기였다. 따라서 새로운 난을 구하는 것은 너무나 비용이 많이 들고 어려워졌다. 그래서 한 때 난은 일반화훼 식물에 그 유행의 자리를 내어 줄 것처럼 보였다. 난 배양의 혁명은 1922년 미국 Cornell 대학의 Lewis Knudson교수의 한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난을 포함한 여러 식물의 종자의 발아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몇가지 무기질 영양소와 설탕이 함유된 agar jelly를 담아놓은 유리 플라스크 안에서 난의 종자가 발아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 것은 난을 기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한 개의 씨방에서 수천 수만 개의 난을 배양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로써 배양묘가 빠르고 싸게 생산되어 보급되기 시작되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종이 다른 난끼리의 인공수분을 통해 보다 관상가치가 높은 새로운 종의 개발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양란은 이러한 교잡에 의하여 오늘날까지 끊임 없이 새로운 종이 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영국과 프랑스, 하와이 그리고 미국에 난을 공급하는 기업이 설립되어 세계 난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0년에 이르러 난의 생장점을 이용한 조직배양의 성공으로 난관련 산업은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며 오늘에 이른다. <참고문헌> ![]() 1. Orchids care and cultivation, Maurice Lecoufle,1994,Cassel Publishers Ltd. 2. The illustrated Encyclopedia of orchids,Alec Pridgeon 1992 Timber press 3. HomeOrchidGrowingRebeccaTysonNorthen,1990,PrenticeH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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